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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체 게바라 남미역사상 가장 사랑받은 불멸의 혁명가

체 게바라 남미역사상 가장 사랑받은 불멸의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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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지 않는 한, 그것이 삶의


목표라는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다"


위 말은 남미의 어느 혁명가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체 게바라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며, 아르헨티나 출신이지만


쿠바에서 영웅시되며 위대한 혁명가로 역사에


기록되어있는 인물이다. 체 게바라라는 인물이


뭐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그의 얼굴은 알거


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정도로,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유명한데, 그건  체 게바라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찍은 코르다가 그 사진의 경우 저작권료를


받지 않겠다고하여 수많은 회사들과 개개인들이


그 사진을 상업적 용도로 사용하여 그의 얼굴이


많이 알려져버렸기 때문이다. 아직도 체 게바라


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가 각국에서 심심찮게


보여질 정도이다.




사실 체 게바라의 경우 남미에서의 인기는 말할것도


없거니와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고


최근 중국에서도 중국의 예술가들이 좋아하는 


인물중에 한명으로 거론될만큼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지도를 가진 인물이지만, 정작 체게바라가 살아생전


무슨 업적을 남겼길래 이렇게 유명한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고 한다. 실제로 많은 젊은이들이 체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다니곤 하는데, 그들에게


티셔츠속 얼굴의 주인공이 살아생전 어떤일을 했는지


물어보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는 웃지못할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체 게바라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이번에는 체 게바라의 생애를 간단하게 


말해보고자 한다. 




체 게바라의 생애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산타 페 주


로사리오의 귀족가 혈통을 이어받은 중상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원의 원장이였고


그 영향으로 체 게바라 역시 의학을 전공하게 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다녔는데,


천식이 있음에도, 격렬한 스포츠를 즐겼으며, 특히


좋아하는 운동은 미식축구로 학창시절 즐겨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여행을 좋아했는데,


의대를 다니던 시절에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모터 사이클을 한대만 가지고, 남미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을 떠난적이 있으며, 이 유명한 여정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 되었을 정도다.




영화의 제목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이다.


그는 의과대학을 졸업,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가


된 후에도 여행을 떠나는데, 그 여행을


 통해 피폐한 남미의 현실을 알게되고,  미국의


CIA 사주를 받은 군부가 좌파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며 체 게바라는 결국 의사를 그만두고


혁명에 가담하게 된다.  체 게바라가


혁명가로의 족적을 처음 남긴곳은 과테말라로


이곳에서 여성혁명가인 일다 가데아 아코스타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걸로 유명하다. 허나


과테밀라의 혁명은 실패로 끝나게 되고, 쿠테타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체 게바라가 올라가게


됐고, 결국 체 게바라는 멕시코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이곳에서 평생 동지라고 할 수


있는 쿠바 혁명의 지도자격이였던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체 게바라 역시 쿠바 혁명에 가담하게 된다.





그들은 멕시코에서 쿠바혁명군을 조직


군사적인 준비를 갖추어 나간다. 이때


체 게바라는 스페인 내전을 겪은 바 있던


베테랑 군인 알베르트 바요 아래에서


군사적 훈련을 받아 한명의 당당한


병사로 성장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정도 준비가 갖춰지자


82명의 혁명군은 쿠바로 넘어가게 되는데,


상륙 직후 대부분이 바티스타 정부군의 기습으로


사살되거나 체포 되어 17명 정도되는 인원으로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혁명군은 차츰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시작


결국 1959년에 쿠바혁명에 성공하게 되고, 대장이였던


피델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게된다. 그후에 체 게바라는


쿠바 시민이 되어, 라카바니아요새의 사령관, 국가


토지개혁위원회 위언장, 중앙은행 총재, 공업 장관등을


역임하며, 쿠바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되며, 각국의


해외 대사로 파견되어 외교활동도 하게되었으며,



UN총회에도 쿠바 대표로 참석을 할 정도로 쿠바내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쿠바의 지도자였던


카스트로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친소련정책을 편 반면


체 게바라는 반소련적인 행동들을 해왔고, 이에 소련에서


카스트로에게 압박을 넣어, 결국 체 게바라는 모든 공직


에서 사임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체 게바라는 다시


혁명에 뛰어들어, 이번에는 아프리카의 콩고에


가게된다. 하지만 당시 콩고는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친소련 국가인 쿠바출신이였던 체 


게바라를 달가워 하지 않았다. 결국 얼마되지


않아 콩고의 공산세력에 떠밀리다시피 콩고를


떠나게되어 이내금 남미로 넘어간 체 게바라는


이번에는 볼리비아의 혁명에 눈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볼리비아에서의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이미 소련에게 미운털이 박힌 체 게바라


였기 때문에, 소련과 연계를 하고있던 볼리비아의


공산당 입장에서도 체 게바라가 달가워 보일리가


없었고, 때문에 볼리비아 공산당은 체 게바라에게


그 어떤 지원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체 게바라는


스스로 소규모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볼리비아 공산당과


연계없이 별도의 활동을 하게되지만 볼리비아의 현지


인들은 매우 보수적이여서 외지인을 반기기는 커녕 


적대시 하기 일쑤였고, 체 게바라도 마찬가지로


볼리비아의 주민들에게 적대시되었다. 결국


빈손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CIA가 네이비 씰에 의해


양성된 정예 레인저부대를 풀어 체 게바라를 


사냥하기에 나섰고, 결국 11개월의 추격끝에


1967년 10월 8일 본대와 떨어져 있던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정부군 특무대대에 의해 


몇명의 부하들과 함께 생포된다. 생포된 후에는


미국이 주도하여 체 게바라는 처형하도록 하며,


결국 총살당하여 그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체 게바라에 대한 평가


체 게바라는 죽어서 오히려 인기가 하늘을


치솟게 되었으며, 그를 죽이는데 공언한 미국


에서 아이러니 하게도 더욱 추앙받게 되었다.


공산권인물치고 주인공으로 할리우드에 영화화된


인물이며 그가 주인공인 작품이 무려 3편이나


된다고 하니, 미국내에서 그의 인기가 어느정도


인지 알수가 있다. 일각에서는 체 게바라의 이러한


인기는 상품화로 인한것이지 그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고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건, 최근들어 한국에서 유행하는 말들로


설명을 해보자면 체 게바라는 흔히 말하는 


금수저로 태어나서, 흙수저들의 고통을 보고 


흙수저들의 고통을 덜고자 자신이 가진


모든것을 버리고 총을 잡고 혁명에 나선 인물로,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누구들처럼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며 잘먹고 잘살 궁리나 했던게


아니라, 마지막까지도 남미대륙의 혁명을 위해


싸우다 죽어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로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천식이 있었음에도 격렬한 운동을


즐겼으며, 고위직에 있을때도 누구보다 고강도


노동을 앞서서 했고, 편하게 의자에 앉아서 


서류나 끄적거리기 보다는 온갓 게릴라전을


감내했을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으며


도전정신을 가진 인물이였다고 볼 수 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항상 혁명가로써


남미대륙의 빈곤과 억압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키고자 일평생 노력했다는 사실이


체 게바라가 죽은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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